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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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381년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해 소집된 기독교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아리우스파 문제와 성령의 신성을 다루기 위해 열렸다. 주요 결정 사항으로는 니케아 신조를 확대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채택하고, 아리우스파와 여러 이단을 배척한 것이 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지위를 로마 주교 다음으로 규정하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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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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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정보 | |
명칭 |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로마자 표기 | Je1-cha Konseutantinopeolliseu Gong'uihoe |
라틴어 명칭 | 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
그리스어 명칭 | Σύνοδος τῆ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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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381년 |
승인 |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고대 동방교회 성공회 루터교 개혁교회 |
이전 공의회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에페소스 공의회 |
소집자 |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
의장 | 알렉산드리아의 티모테오 1세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넥타리오스 |
참석자 수 | 150명 (서방 교회 대표는 없었음) |
주제 | 아리우스주의 성령 |
문서 | 381년 니케아 신경 7개의 교회법 (3개는 논쟁 중) |
2. 배경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하며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아리우스파와 관련된 논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40] 오히려 이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까지 얽히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 분열된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필요했다. 380년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방 교회를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기독교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는 정통 신앙을 지지하며 제국 전체의 통합을 강화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신앙과 교회 규율 문제를 다룰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5]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가 많은 지역이었으나,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던 황제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공의회를 준비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바라고 있었다. 마침내 381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2차 세계 공의회(후대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공의회에는 약 150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모두 동방 지역 교회 소속이었다. 이 공의회는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령에 대한 내용을 보강하여 확장하며[40],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여러 이단적 가르침들을 배척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1]
2. 1. 역사적 배경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지만, 아리우스파와 관련된 논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은 표면적으로 신조를 수용한 뒤 교회로 복귀했으며,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같은 인물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니케아 신조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되는 등[40] 정치적인 문제까지 얽히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고 아리우스파에 우호적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황제가 되면서, 니케아 신조 자체를 수정하거나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이 시기 신학 논쟁은 주로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의 신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의 제3위격인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새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주의(혹은 프뉴마토마키아주의)는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며 이러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물론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꾸준히 존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와 더불어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이후 열릴 공의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면, 니케아파 신학자 중 한 명인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리우스주의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신적인 마음만을 가졌을 뿐, 완전한 인간 본성(인간적 마음 포함)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6] 그의 주장은 신성의 위격을 혼동하고 사벨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362년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에서 정죄되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변화했다. 니케아 신조를 정통 신앙으로 확립하고자 했던 그는 동방 교회를 니케아 기독교로 되돌리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황제는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신앙과 교회 규율 문제를 다룰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5]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지만, 황제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협력하여 공의회를 준비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분열된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원했기에 황제의 뜻에 동참했다. 마침내 381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2차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2. 2. 신학적 배경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고 아리우스의 파문과 아리우스파의 부정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 논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으며,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까지 얽히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였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등은 표면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수용한 뒤 교회로 복귀하기도 했다. 반면, 아리우스주의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등의 책략으로 인해 결국 추방되는 수난을 겪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고 아리우스주의에 동조적인 성향을 보였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니케아 신조 자체를 다른 신조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360년 무렵까지 신학 논쟁은 주로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의 신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제3위격인 성령의 신성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새로운 논쟁의 대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주의는 성령의 신성을 부인했는데, 이는 프뉴마토마키아(성령을 대적하는 자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니케아 신앙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이 활동했다. 아타나시우스 외에도,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는 이후 열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중요한 신학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니케아 신조를 지지했던 또 다른 신학자인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는 그의 신학적 입장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신적인 마음(logos)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적인 마음을 포함한 완전한 인간 본성을 지녔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6] 이 때문에 그는 신성의 위격을 혼동하고 사벨리우스의 이단적 가르침을 따른다는 비판을 받았다. 카이사레아의 바실은 아폴리나리우스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전적으로 비유적인 해석에 의존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362년 아타나시우스가 주재한 시노드에서 이미 정죄된 바 있었고, 이후 여러 이단으로 분파되었는데, 그중 주요 분파로는 폴레미안과 반 마리아주의자가 있었다.
2. 3. 지정학적 배경
325년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하며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아리우스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정치 문제와 얽혀 더욱 복잡해졌다.[40]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필요했다.380년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방 교회를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기독교로 되돌리려 했다. 그는 정통 신앙을 지지하며 제국 전체의 통합을 강화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신앙과 규율 문제를 다룰 교회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5]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가 많은 도시였기에, 니케아 신조를 강력히 지지하는 황제의 이러한 결정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7]
황제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공의회를 주도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기독교 통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381년 봄, 테오도시우스와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2차 세계 공의회(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했다. 참석자는 약 150명으로 모두 동방 지역 주교들이었다.
당시 상황은 더욱 복잡했는데, 동방의 니케아 신조 지지 세력 내부에서도 주요 두 파벌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지지자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과 적대 관계가 존재했다.[7]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주교들은 수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 왔다. 따라서 안티오키아 배경을 가진 그레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후보로 거론되자,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는 그를 반대했다.
3. 공의회 진행 과정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했음에도, 아리우스파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얽히며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가 많은 도시였으나,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던 황제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공의회를 이끌었다. 공의회에는 동방 지역 주교 약 150명이 참석했다.
공의회 초기, 니케아 신조 수용을 거부한 서른여섯 명의 프뉴마토마키는 회의 참여가 거부되었다.
공의회 의장은 처음 멜레티우스가 맡았으나[15] 그가 개회 직후 사망하자 그레고리우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역시 여러 논쟁 끝에 사임하였고, 최종적으로는 넥타리우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7]
공의회에서는 최종적으로 기존의 니케아 신조에 성령에 대한 내용을 보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를 채택했다. 이를 통해 아리우스파, 아노모이오스파, 성령 피조물설(프뉴마토마코이파), 호모이오스파(유사 본질론자), 사벨리우스주의, 마르켈루스파, 포티누스파,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가현설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것이 결정되었다.[41][40]
3. 1. 공의회 소집과 주도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고 아리우스가 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 문제는 정치 문제와 얽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필요하게 되었다.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들이 많은 도시였으나, 니케아 신조를 지지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공의회를 이끌었다. 공의회에는 동방 지역 주교 약 150명이 참석했다.
thumb, 공의회를 주재했다.]]
공의회 초기, 니케아 신조 수용을 거부한 서른여섯 명의 프뉴마토마키는 회의 참여가 거부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가 불참하면서, 공의회 의장직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멜레티우스가 맡게 되었다.[15] 공의회는 막시무스의 비밀 서임을 무효화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한 것을 확정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멜레티우스가 공의회 개회 직후 사망하면서, 그레고리우스가 후임 의장으로 선출되어 공의회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막시무스의 서임을 지지했던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주교들이 뒤늦게 공의회에 도착하여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니케아 공의회 규정 중 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옮기는 것을 금지한 조항을 근거로, 사시마 교구 출신인 그레고리우스의 임명이 교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6]
맥거킨은 당시 그레고리우스가 육체적으로 지쳤으며 주교들과 황제의 신임을 잃을까 염려했다고 설명한다. 에이어스는 그레고리우스가 안티오키아 주교직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를 지지하고 호모우시안(homoousian, 니케아 신조 지지파)과의 타협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주교들 사이에서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고 덧붙인다.[17]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분열을 심화시키는 대신 사임을 선택했다. 그는 "나는 예언자 요나와 같아지게 하라! 내가 폭풍의 원인이었지만, 배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리라. 나를 잡아서 던지라... 나는 왕위에 올랐을 때 행복하지 않았고, 기꺼이 내려오리라."[18] 라고 말하며 갑작스럽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의 결정은 공의회에 충격을 주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는 극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해임을 요청했다. 황제는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사임을 수락했다. 공의회의 요청으로 그레고리우스는 작별 의식과 축하 연설을 위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 연설(Or. 42)을 남기고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후임으로는 세례를 받지 않은 문관 출신의 넥타리우스가 선출되어 공의회 의장직을 이어받았다.[17]
3. 2.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 문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니케아 신조를 강력히 지지한 것은 계산된 위험을 안고 있었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확고한 아리우스파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동방의 니케아 신조 기독교 주요 두 세력인 알렉산드리아파와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지지자들 사이의 "격렬한 분열... 거의 완전한 적대감에 이를 정도"였다.[7]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의 안정을 막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왔다. 따라서 그레고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는 그의 안티오키아 배경 때문에 그를 반대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호모이시안 아리우스파인 데모필루스였다. 테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된 후 데모필루스에게 니케아 신조 수용을 조건으로 주교직 유지를 제안했지만, 데모필루스는 자신의 아리우스파 신념을 포기하기를 거부했고 즉시 교회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당했다.[8][9] 40년간 아리우스파 주교들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니케아 신조 지지자들에게 돌아갔으며, 아리우스파는 동로마 제국의 다른 도시 교회들에서도 추방되어 동방 기독교의 정통주의가 재확립되었다.
새롭게 회복된 교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견유학파 막시무스가 이끄는 세력은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루스 총대주교의 지지를 얻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가 동방 교회의 주도권을 유지하도록 페트루스에게 복종하는 인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로 세우려 계획했다.[10] 많은 기록은 막시무스를 거만하고 야심 찬 인물로 묘사하지만, 그가 개인적인 야망으로 이 자리를 노렸는지, 아니면 권력 다툼의 도구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그레고리오가 병으로 자리를 비운 밤, 공모자들은 대성당에 침입하여 막시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로 축성하려 했다. 그들이 막시무스를 대주교 좌에 앉히고 그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을 때 날이 밝았다. 사건 소식이 빠르게 퍼지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치안판사와 관리들이 나타나 막시무스와 그의 축성자들을 대성당에서 쫓아냈다. 그들은 결국 플루트 연주자의 집에서 삭발을 마쳤다.[11]
주교좌를 찬탈하려 한 이 대담한 시도는 그레고리오에게 호의적이던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막시무스는 자신의 주교직을 인정받기 위해 테살로니카로 가서 황제에게 호소했지만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문제를 존경받는 테살로니카 주교 아스콜리우스에게 맡겨 교황 다마수스 1세의 조언을 구하도록 했다.[12]
다마수스는 막시무스를 즉시 인정하지 않았으며, 테오도시우스에게 안티오키아 분열 문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를 위한 적합한 주교 선출 등 다양한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 회의를 소집하라고 조언했다.[13] 다마수스는 또한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주교를 이동시키는 관행을 비판하며 테오도시우스에게 "비난받을 점이 없는 주교가 그 교구에 선택되도록 주의하라"고 촉구했다.[14]
3. 3. 공의회 의장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베드로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의회 의장직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멜레티우스에게 돌아갔다.[15] 공의회 초기에는 막시무스의 비밀스러운 서임을 무효화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나지안의 그레고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한 것을 확정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멜레티우스가 공의회 개회 직후 사망하면서, 그레고리가 새로운 의장으로 선출되어 공의회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막시무스의 서임을 지지했던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주교들은 공의회에 늦게 도착했고, 그레고리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수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니케아 공의회의 규정 중 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옮기는 것을 금지한 조항을 근거로, 그레고리가 사시마 교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것은 교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16]
맥거킨은 당시 그레고리가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고, 주교들과 황제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에이어스는 더 나아가 그레고리가 안티오키아 주교직 선출에서 패배한 후보를 지지하고, 호모우시안(동일본질론자)과의 어떠한 타협에도 강하게 반대하면서 주교들 사이에서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고 분석한다.[17]
결국 그레고리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분열을 심화시키기보다는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나는 예언자 요나와 같아지게 하라! 내가 폭풍의 원인이었지만, 배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리라. 나를 잡아서 던지라... 나는 왕위에 올랐을 때 행복하지 않았고, 기꺼이 내려오리라."[18] 라고 말하며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임 선언은 공의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극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그의 말에 감동하여 박수를 보내며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임을 허락했다. 공의회는 그에게 작별 의식과 축하 연설을 위해 다시 한번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레고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마지막 연설(Or. 42)을 남기고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후임으로는 당시 세례를 받지 않은 문관이었던 넥타리우스가 새로운 공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7]
4. 주요 결정 사항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령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는 등 내용을 보완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채택하였다. 이를 통해 아리우스파와 그 분파들(에우독시우스파, 아노모이오스파, 호모이오스파 등),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Πνευματομάχοι|프뉴마토마코이파grc(성령 피조물설), 그리고 사벨리우스주의, 마르켈루스파, 포티누스파,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등 당시 논란이 되었던 여러 신학적 가르침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기로 결정하였다.[40][41]
4. 1.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채택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고 아리우스가 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정치 문제와 얽혀 더욱 복잡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주최하여 새로운 공의회가 열렸다.[40]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통적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가 많은 곳이었지만,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던 황제는 자신이 신뢰하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공의회를 주도하였다. 공의회에는 약 150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모두 동방 지역 출신이었다.공의회에서는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수정하고 보완하여 새로운 신조를 채택했다. 특히 성령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명확히 했다. 이렇게 확립된 신조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부른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에 더해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교회, 세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조항을 포함한다. (두 신조의 전체 내용은 325년 신조와 381년 신조의 비교 참조.)
이 신조의 채택을 통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여러 사상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40]
배척된 사상 | 주요 내용 |
---|---|
아리우스파 (에우독시우스파 포함) |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함. |
아노모이오스파 (에우노미우스파) | 성자가 성부와 다르다(anomoios)고 주장함. |
성령 피조물설 (프뉴마토마코이파) |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함. |
호모이오스파 | 성자가 성부와 유사하다(homoios)고 주장하며 니케아 신조의 동일본질(homoousios)을 거부함.[41] |
사벨리우스주의 | 성부, 성자, 성령을 한 하느님의 세 가지 양태로 봄 (양태론). |
마르켈루스파 | 로고스가 성부와 하나였다가 성육신 때 분리되었다고 봄. |
포티누스파 | 예수가 신적인 로고스와 결합된 인간이라고 주장함. |
아폴리나리우스주의 |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영혼 대신 신적인 로고스를 가졌다고 주장하여 완전한 인성을 부정함. |
그러나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실제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공포되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신조나 유사한 내용이 공의회에서 언급되었을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결의는 아니었다고 본다. 또한 이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단순히 확장한 것인지, 아니면 니케아 신조와 유사한 다른 전통적인 신조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이 신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150명의 성도들의 신조"라고 명확히 언급하며,[36] 늦어도 451년에는 이 신조가 381년 공의회와 공식적으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4. 2. 이단 배척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부정하고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정치 문제와 얽혀 더욱 복잡해졌다.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공의회에서는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수정하고 성령에 대한 내용을 보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최종적으로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신경은 정통 신앙의 기준을 더욱 명확히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이단 사상들을 배척하기로 결정했다.
주요 배척 대상은 다음과 같다.[40]
- 아리우스파 계열: 아리우스파(에우독시우스파), Anomoeans|아노모이오스파영어(비유사, 에우노미우스파), Homoian|호모이오스파영어(니케아 신조의 '동질'(호모우시오스) 대신 '유사'(호모이오스)를 주장한 이들) 등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가르침.
- 성령론 관련: Πνευματομάχοι|프뉴마토마코이파grc(성령 피조물설) -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가르침. 이는 종종 마케도니우스주의와 동일시된다.
- 기타 삼위일체 및 기독론 관련: 사벨리우스주의, 마르켈루스파, 포티누스파,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등 당시 논란이 되었던 다른 신학적 가르침들.
이러한 결정을 통해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포함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공고히 하고, 다양한 이단적 가르침들과 명확히 선을 그었다.
5. 공의회 이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령에 대한 교리를 보강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확립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삼위일체론 교리가 더욱 공고해졌으며, 아리우스주의 등 주요 이단 사상이 단죄되었다.[40][41] 이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 논의가 삼위일체 문제에서 그리스도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공의회는 제3규정을 통해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에게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를 부여했다.[21][20][19]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적 위상을 교회 서열에 반영한 조치였으나, 전통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반발을 야기했다. 특히 로마 교회는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주장했고,[31][32] 이는 이후 동서 교회 분열로 이어지는 오랜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공의회에서 제정된 교회법들은 이후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의 중요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초기 4개 교령만을 인정했으며,[19]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위를 격상시킨 제3규정은 서방 교회에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동방 교회의 독자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교회 전체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5. 1. 교회법
공의회에서는 총 7개의 교령이 채택되었는데, 이 중 4개는 교리적 교령이고 3개는 징계적 교령이다. 이 교령들은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 모두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처음 4개의 교령만을 인정한다.[19] 이는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처음 4개의 교령만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3개는 나중에 추가되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20]각 교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교령: 아리우스주의, 마케도니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모든 분파를 교리적으로 단죄하였다.[19]
- 제2교령: 주교들이 자신의 교구 및 총대주교 관할 구역 경계를 넘어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법령을 재확인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강조했다.[19]
- 제3교령: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의 명예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 내 위상을 높였다.[21][20][19]
- 제4교령: 막시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로 서임한 것을 무효로 판결했다. 교령은 "막시무스는 주교가 아니었고 지금도 주교가 아니며, 그가 서임한 사람들은 어떤 성직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19][22] 이는 막시무스뿐만 아니라, 그를 비밀리에 서임하기 위해 공모했던 이집트 주교들과 막시무스가 이집트에서 서임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하위 성직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23]
- 제5교령: 서방 주교들의 신앙 선언문(토메, Tome)에 관한 내용으로, 아마도 교황 다마수스 1세의 것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령은 공의회 다음 해인 382년에 통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9]
- 제6교령: 주교의 잘못을 고발할 수 있는 자격과 절차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이 교령 역시 382년에 통과되었을 수 있으며, 훗날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교령 95로 다시 통과되었다.[19]
- 제7교령: 특정 이단에 속했던 사람들이 정통 교회로 돌아올 때 받아들이는 절차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19]
5. 2. 제3규정 논쟁
제3규정은 당시 새로운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중요성이 커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을 반영하는 첫 단계였다. 이 규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 서열을 부여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서열을 사실상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초대 교회 시기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는 기존의 명예로운 지위를 유지했다.처음에는 이 규정이 큰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451년 열린 칼케돈 공의회의 첫 회기에서 교황 사절이었던 파스카시누스는 이 규정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언급했으며[24], 또 다른 교황 측 인물인 도를리움의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로마의 가장 거룩한 교황에게 직접 이 규정을 읽어주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25]
그러나 이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제28규정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면서 제3규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교황 레오 1세는 제3규정이 로마에 정식으로 제출된 적이 없으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회의 질서를 어기고 다른 총대주교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26] 이후 수 세기 동안 서방 기독교는 로마 주교가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동서 분열 시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도 계승을 근거로 다른 교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869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가톨릭교회)에서 로마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보다 로마 주교의 우선권을 명확히 주장했다.[27] 1054년 교회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된 후,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제5규정을 통해 로마 교회가 "신의 뜻에 따라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자 주님으로서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월한 권한을 가진다"고 선언하며 로마의 우위를 공식화했다.[28][29] 중세 교회법 학자인 그라티아누스의 저술을 수정한 로마 측 인물들은 제3규정 주석에 "canon hic ex iis est quos apostolica Romana sedes a principio et longo post tempore non recipit|카논 히크 엑스 이스 에스트 쿠오스 아포스톨리카 로마나 세데스 아 프린키피오 에트 롱고 포스트 템포레 논 레키피트la" ("이 규정은 로마의 사도좌가 처음부터 그리고 그 이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은 규정 중 하나입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로마 교회의 입장을 강조했다.[30]
나중에 역사가 바르니우스는 세 번째 규정이 진본이 아니며 실제로 공의회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대략 동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것이 로마 주교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primus inter pares|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la" 즉 '동등한 자들 중 으뜸'이라는 수위성을 선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5. 3. 영향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를 최종적으로 단죄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381년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가 주재한 아퀼레이아 공의회에서도 추가적으로 확인되면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공의회에서 기존의 니케아 신조에 성령에 대한 내용을 보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채택되면서, 삼위일체론 교리가 더욱 확고하게 정립되었다.[40][41] 이로써 신학적 논의의 중심은 삼위일체 문제에서 그리스도론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는 이후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교회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공의회는 세 번째 규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로운 로마'로 규정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부여했다.[31][32] 이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적 위상을 교회 내 서열에 반영한 조치였다. 이 결정은 교황 다마소 1세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반발을 샀다. 382년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격상에 항의하며, 로마 교구의 수위권은 공의회의 결정이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1][32] 일부 학자들은 교황 다마소 1세가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위 격상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33] 다른 학자들은 이 공의회를 통해 동방 교회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한다. 공의회 주재 주교들이 모두 동방 출신이었고, 교황이 특정 주교들의 임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음에도 동방 주교들이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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